1970년 함양읍의 항공사진이다. 제사공장(현 한주아파트) 왼쪽 아래에 작은 공터가 당시 시외버스 주차장이다. 60년대 이전 낙원사거리 현 농협용평지소 자리가 주차장이었으나 도심 주변 변두리로 이전 하였고 다시 변두리로 이전하여 현재의 시외버스 주차장 자리로 옮겨지게 된다. 이제 건너편 오른쪽 용산들로 시외버스 주차장 이전이 계획되고 있으나 인구의 감소로 인해 그 유용성은 재고되어야 하지 않을까.
원교, 돌북, 봉강, 상동, 하동 등의 명칭상 마을의 범위와 경계선은 지금은 주거단지과밀화로 인해 명확하지 않지만 옛 항공사진을 보면 뚜렷하게 구분되는 마을의 범위를 이루고 있다.
함양 인구 10.6만, 당시 부산일보를 소유하고 있었던 조선견직 산하 함양제사가 있었다. 함양에서 진주 해동제사로 가는 누에 공급량이 처리 못할 정도로 많아 함양에 제사공장을 세웠고 1974년에 아예 독립법인 함양제사를 만든다. 이후 제사공장의 쇠퇴로 인해 대도시로의 인구유출이 더 가속화 된다.
1987년은 함양에 대규모 아파트가 들어서기 10년 전이다. 함양읍을 바둑판으로 보면 90년대 부터 비어있는 곳에 주택이 들어서면서 공간을 메꾸게 된다. 함양의 아파트 건설은 한주아파트를 필두로 진고개를 넘어 땅값이 싼 곳으로 이동하며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주공아파트에 다다른다. 20년 후에 누가 옳았는지 보자며 함양의 지역발전을 최대한 늦추었던 민선 정용규 군수에 이어 천사령 군수가 취임하며 기업유치와 상림개발이 이루어진다. 이때 백무동도 규제가 풀리며 허름한 슬레이트 민박집에서 펜션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두 군수 중 누가 옳았는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다만, 예전엔 대도시로의 인구유출로 인한 인구감소였다면 지금은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감소가 더 심각해졌기 때문이다. 민선 초기 부터 기업유치와 지역개발을 한다고 해서 인구감소를 늦출수 없다는 현실이 다가와 버렸다. 반대로 개발이 되어야만 함양군민의 생계가 넉넉해지고 현실적으로 개발된 상림주변의 경제가 활성화 된데는 이견이 없다. 세월이 흘러 대다수의 관광지가 그렇듯이 상권이 죽어가고 개발에 따른 후유증이 대두될 땐 난개발에 대한 목소리가 커질 수 있다. 보존과 개발 그 균형과 미래를 바라보는 안목이 중요하다.
70년대만 해도 상림과 필봉산의 작은 숲외엔 산지 중턱까지 전부 농토로 개간되어 있다. 조그마한 땅이라도 악착같이 개간하여 농사를 지었음을 알 수 있고 대가족사회에서 자손이 늘어남에 따라 농지를 끝도 없이 개간했어야만 했던 사회상을 알 수 있다.
한때 11만에 달했던 함양군 인구수는 이제 3만대로 줄었다. 2만대로 내려앉는다면 길거리에 공무원만 보이는 지경에 이른다. 그렇다고 존폐를 거론하는 것도 어떠한 해결책이 아니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지 않는가. 70년대, 인구는 많았지만 몇개의 구멍가게 만으로도 충분했던 소비행태에서 인구가 적은 현재는 그 규모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마트들이 난립해 있어도 영위가능한 소비행태로 변해 있다.
즉, 인구의 많고 적음이 지역의 존폐와 경제의 대소를 결정하는게 아니다. 군민들이 농사든 상업이든 간에 구멍가게 운영의 인식에서 벗어나 인구가 줄어드는 만큼의 늘어나는 농지, 상업지구, 주거지구의 가용 면적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의 보다 큰 사업운영의 인식으로 바꾼다면 함양이라는 이름의 역사는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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